[기자수첩] 참 별사람들 많다…억지 주장으로 이재명 정부를 공격하는 진보와 보수 가장한 그들의 속내는기본소득은 ‘화폐 사회화’, 공공주택은 ‘토지 사회화’라는 황당한 색깔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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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국,유시민,한동훈,김어준 (AI합성) |
최근에는 칼 폴라니까지 동원됐다. 용혜인 성평등가족부 장관 후보자 지명을 ‘화폐의 사회화’, 홍지선 국토교통부 장관 후보자 지명을 ‘토지의 사회화’라고 해석한다.
그러나 성평등가족부 장관이 국가의 화폐제도를 바꿀 수 있는가. 공공주택 정책을 경험한 행정관료가 토지 사유제를 폐지할 수 있는가. 정부 조직과 정책 권한의 기본 구조만 살펴봐도 지나친 비약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기본소득은 화폐를 공산화하는 정책이 아니다. 국가가 재정을 통해 국민의 기본적인 삶을 지원하는 복지·경제정책이다. 공공주택 역시 개인의 토지를 몰수하는 제도가 아니라 시장에서 해결되지 않는 주거 불안을 공공이 보완하는 정책이다.
그런데도 이를 ‘화폐와 토지의 사회화’라고 부르는 속내는 무엇인가. 복지 확대와 부동산 불로소득 억제에 대한 거부감을 ‘사회주의 공포’로 포장하려는 것은 아닌가. 정책의 실제 효과를 놓고 토론하면 반대 논리가 약해지니, 사회주의라는 낙인을 먼저 찍어 논의 자체를 차단하려는 것이다.
반대편에서는 정반대의 공격이 나온다. 이재명 대통령이 기업투자와 수출 확대, 자본시장 활성화, 첨단산업 육성, 규제 합리화를 강조하면 일부 진보는 기다렸다는 듯 “보수화됐다”, “재벌과 타협했다”고 비판한다.
그러나 성장이 없으면 복지도 지속될 수 없다. 기업이 투자하지 않고 일자리가 만들어지지 않으며 세수가 줄어들면 기본사회와 사회안전망을 확대할 재원도 사라진다. 기업의 정당한 이윤을 인정하는 것과 독점·투기·정보 격차를 이용한 부당한 초과이익을 방치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그런데도 성장정책을 무조건 우클릭이라고 몰아붙이는 속내는 무엇인가. 자신들이 오랫동안 독점해 온 ‘진보의 기준’을 이재명이 따르지 않는다는 불만은 아닌가. 구호와 이념을 앞세워 영향력을 유지해 온 일부 세력에는 진보정책과 성장정책을 동시에 추진하는 실용정부가 오히려 불편할 수 있다.
협동조합과 사회적기업을 두고도 이상한 주장이 이어진다. 마치 이들이 시장경제를 무너뜨리기 위해 숨어서 움직이는 사회주의 조직인 것처럼 묘사한다.
협동조합과 사회적기업은 자본주의 시장 안에서 돌봄과 고용, 지역경제, 취약계층 지원 같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활동하는 경제주체다. 시장과 공공이 해결하지 못한 영역을 보완하는 것이지 생산수단을 강제로 국유화하는 조직이 아니다.
더 황당한 것은 구체적인 증거도 없이 ‘언더조직’과 ‘배후 실세’를 등장시키는 주장이다. 누가 어떤 회의를 했는지, 어떤 문서를 만들었는지, 어떤 예산과 인사에 개입했는지에 대한 증거는 없다. 이름 몇 명을 이어 붙이고 “가설은 이미 있었다”고 말하는 것은 분석이 아니라 음모론에 가깝다.
그 속내도 짐작할 수 있다. 정책으로는 공격하기 어려우니 사람과 사람 사이에 보이지 않는 선을 긋고, 거대한 배후세력이 존재하는 것처럼 만들어 공포를 확산시키려는 것이다. 사실을 밝히는 것이 목적이라면 증거부터 제시해야 한다. 증거 없이 의혹만 반복한다면 진실 규명이 아니라 정치적 낙인찍기가 목적이라는 의심을 피하기 어렵다.
이재명 정부는 생산수단을 국유화하겠다고 선언한 적이 없다. 오히려 기업투자와 자본시장 활성화, 수출 확대, 첨단산업 육성과 성장을 국정의 중심에 놓고 있다. 동시에 부동산 투기와 독점, 불공정과 불로소득을 억제하고 사회안전망을 강화하겠다는 것이다.
이것은 사회주의 혁명도, 진보 가치의 포기도 아니다. 시장경제의 활력은 살리되 시장의 실패와 불공정은 국가가 바로잡겠다는 실용주의다.
일부 보수가 두려워하는 것은 사회주의가 아니라 부동산·독점·특권 구조에 대한 개혁일 수 있다. 일부 진보가 불편해하는 것은 보수화가 아니라 자신들의 승인 없이 진보와 성장을 결합해 성과를 내는 정치의 등장일 수 있다.
보수에는 기존 기득권을 흔드는 대통령이고, 일부 진보에는 자신들이 정해 놓은 노선을 따르지 않는 대통령이다. 그래서 한쪽에서는 “너무 진보적”이라고 공격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충분히 진보적이지 않다”고 공격한다.
진보와 보수가 양쪽에서 동시에 이재명을 공격하는 이유는 역설적으로 분명하다. 이재명의 정치가 기존의 낡은 이념 구분에 갇히지 않기 때문이다. 국민에게 필요하다면 진보정책이든 보수정책이든 가리지 않고 사용하며 결과로 평가받겠다는 것이다.
기본소득과 공공주택을 추진하면서 기업투자와 성장을 강조할 수 있다. 노동자의 권리를 보호하면서 기업의 혁신을 지원할 수 있다. 복지를 확대하면서 재정의 효율성을 요구할 수도 있다. 이것이 모순처럼 보인다면 현실을 이념의 한쪽 눈으로만 보고 있기 때문이다.
이재명 정부를 비판할 수 있다. 권력은 반드시 비판받아야 한다. 그러나 비판하려면 예산과 법안, 정책의 효과와 부작용을 근거로 해야 한다. 사회주의, 배신, 언더조직, 배후 실세 같은 자극적인 단어를 반복한다고 주장이 사실이 되는 것은 아니다.
정권을 공격하는 것 자체가 목적이 되면 칼 폴라니도 음모론의 소품으로 전락하고, 진보와 보수의 이념도 정치적 낙인이 된다. 국민이 원하는 것은 낡은 색깔론과 진영 싸움이 아니다.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고 삶을 바꾸는 정치다.
결국 이들의 속내를 가르는 기준은 간단하다. 이재명 정부의 정책이 실패할까 걱정하는 것인지, 아니면 성공할까 두려워하는 것인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