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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극으로 얼룩진 조선의 사형 집행자들, 그 잔혹한 운명과 선택

"금전과 처벌: 망나니가 죄수 가족에게 요구한 대가와 잔혹성"
"부패와 폭력의 상징이 된 망나니, 그들의 사회적 신분과 역할"
"가보개혁 이후 사라진 잔혹한 형벌, 참형 제도의 종말"

김학영 기자 | 기사입력 2024/11/11 [07:06]

비극으로 얼룩진 조선의 사형 집행자들, 그 잔혹한 운명과 선택

"금전과 처벌: 망나니가 죄수 가족에게 요구한 대가와 잔혹성"
"부패와 폭력의 상징이 된 망나니, 그들의 사회적 신분과 역할"
"가보개혁 이후 사라진 잔혹한 형벌, 참형 제도의 종말"

김학영 기자 | 입력 : 2024/11/11 [07:06]

조선시대의 사형 집행인은 사회적으로 경멸받던 존재였지만, 그들이 수행한 일은 매우 잔혹하고 복잡한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사형 집행인은 단순히 사형을 집행하는 이가 아니라 사형수와 그 가족에게 금전적 이익을 챙기며 처형 방식에 변화를 주기도 했고, 종종 그들의 권한을 넘어선 처형을 감행하기도 했다. 이러한 집행인들은 망나니라 불리며 사회의 천대받는 계층으로 남았고, 조선의 잔혹한 형벌 제도는 그들의 비극적 운명을 더욱 부각시켰다.

 

조선 인조 7년에 발생한 임경사의 처형 사건은 당시 사형 집행인의 역할과 권한에 대한 중요한 예시로 남아 있다. 임경사는 역모죄로 사형이 언도되어 형장에 끌려가던 중 오만하게 "내 이름이 장차 역사책에 오를 것"이라고 외치며 최후의 순간까지 고개를 들었다. 사형 집행인은 그의 이런 태도에 격분하여 단칼에 끝내지 않고, 그의 등에 칼을 세 번 내려찍은 후 사지를 찢어버리는 잔인한 처형을 집행했다. 이는 사형 집행인이 단순한 직무 수행을 넘어 분노에 휩싸인 채 가혹하게 죄인을 다룰 수 있음을 보여준다.

 

사형 집행인 망나니의 역할은 종종 역사적 사건과 맞물려 더욱 어두운 이미지로 남아있다. 영화나 사극에서 보는 그들의 모습은 먼지와 피로 얼룩진 옷차림이지만, 실제로는 비교적 멀끔한 옷을 입었고, 사형 도구로는 협도와 같은 날카로운 칼을 사용했다. "망나니"라는 용어는 사형 집행인을 비하하는 표현이며, 공식적인 호칭으로는 행영쇠장, 도우탄, 회자수 등으로 불렸다. 이들은 군인 신분을 가지며, 처형 집행을 통해 일정한 급료를 지급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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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시대 사형 집행인인 '망나니'의 실제 모습을 담은 사진은 남아 있지 않습니다. 이는 당시 사진 기술이 발달하지 않았고, 망나니의 활동이 기록으로만 전해졌기 때문입니다. 다만, 조선시대의 사형 집행 장면을 묘사한 그림이나 현대의 재현 자료를 통해 그들의 모습을 유추할 수 있습니다.    

 

사형 집행 방식은 죄인의 무릎을 꿇린 뒤 여러 번에 걸쳐 칼을 내리치는 형태로 진행되었고, 단번에 끝나는 것이 아니라 처형 과정에서의 고통을 극대화하는 방법을 택했다. 역사적으로 조선의 사형 집행 장면에서는 집행인이 목을 내리치는 과정에서 실수하여 죄인을 더욱 고통스럽게 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전해진다. 이는 사형 집행이 단순한 형벌 이상의 고통을 주는 처벌 방식으로 사용되었음을 시사한다.

 

조선시대의 사형 집행은 죄인에게 극도의 고통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부패의 온상이기도 했다. 특히 회자수로 불리던 사형 집행인들은 죄수와 그 가족에게 뇌물을 요구하며, 금전을 받지 못할 경우 더욱 잔인한 처형을 감행했다. 예를 들어, 윤준이라는 인물이 처형될 때 그의 아내는 남편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 회자수에게 금전을 전달하려 했으나 실패했고, 윤준은 고통스럽게 죽음을 맞이했다. 또 다른 사례로, 1839년 기해박해 당시 최양업 신부의 어머니는 자식들을 위해 회자수에게 뇌물을 전달했고, 회자수는 그 약속을 지켜 보다 나은 방식으로 처형을 집행했다. 이처럼 사형 집행인은 죄인의 운명을 좌우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고, 부정한 방식으로 재산을 축적하기도 했다.

 

망나니의 부정 행태는 사형 집행 밖에서도 계속되었다. 명절이나 기념일이 되면 이들은 거리로 나가 떼를 지어 쌀가게에서 쌀을 훔치거나, 상인들을 협박해 물건을 빼앗기도 했다. 이는 이들이 사회적으로 천대받는 신분으로, 다른 직업을 가지기 어려웠고, 관에서 받는 급료가 충분하지 않다는 현실을 보여준다. 이후 관할 당국은 이들의 생계를 안정시키기 위해 전답을 구매해 급료 대신 농지를 지급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조선시대의 사형 제도는 복잡한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사형수가 다른 사형수를 처형하는 일이 존재했으며, 이는 사형수를 사형 집행인으로 삼아 생존을 보장하는 규정으로 이어졌다. 사형수가 집행인이 되면 사형을 면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고, 실제로 조선 후기에는 사형수가 직접 사형을 집행하면서 심리적 갈등을 겪기도 했다. 사형 집행인은 한 번 맡으면 전임자가 사망하기 전까지 교체될 수 없었으며, 이는 사형 집행을 피할 수 없는 운명으로 여겨졌다.

 

이들은 생존을 위해 사형 집행을 선택해야 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죄책감과 심리적 압박에 시달렸다. 일부는 첫 번째 형 집행을 거부했으나, 다른 사람의 설득에 의해 집행을 수행해야 했고, 이후에도 형 집행 과정에서 깊은 고통을 겪어야 했다.

 

조선시대 사형 집행인의 비극적 운명은 1894년 가보개혁을 통해 참형 제도가 폐지되면서 종식되었다. 이후 사형 집행인은 더 이상 사람의 목을 벨 필요가 없게 되었고, 조선에서의 잔혹한 처벌 방식은 사라졌다. 참수형은 이후 많은 나라에서 금지되었지만, 일부 국가에서는 여전히 존재하고 있으며, 이는 현대 사회에서도 처벌의 잔혹성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운다.

 

사형 집행인의 역사적 사례를 통해 알 수 있듯, 조선시대의 처벌 방식은 단순히 형벌의 의미를 넘어선 고통을 가하는 수단이었다. 망나니로 대표되는 사형 집행인들은 사형수와 그 가족에게 금전을 요구하며 직업적 부패와 사리사욕을 채웠고, 직무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권한을 넘어선 잔혹한 처형을 행하기도 했다. 이는 조선시대 사형 집행인이 단순히 형벌을 집행하는 이가 아닌, 당대의 부패와 폭력을 상징하는 존재였음을 의미하며, 조선 사회의 어두운 이면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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