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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단 본능 창작 '사는 게 억울하니?' 앵콜 공연

조기홍 | 기사입력 2026/02/25 [15:34]

극단 본능 창작 '사는 게 억울하니?' 앵콜 공연

조기홍 | 입력 : 2026/02/25 [15:34]

 

 

[내외신문] 조기홍 기자 = 죽는 게 억울한 게 아니라 '사는 게 억울하니?'라고 묻는다. 이렇게 묻는 데에는 무슨 까닭이 있을 것이다. 개인적인 문제든 아니면 사회적인 문제든...

극단 본능(대표 김태흥)이 대학로 이음센터 5층 대공연장에서 3월 20일(금) 4시, 7시, 21일(토) 2시,5시 4회에 걸쳐 올릴 연극의 제목이다. 지난해 8월에 대성황을 이뤄 시낭송가들이 연기자로 대거 참여하여 앵콜 공연을 하게 된 것이다.

 

 

다음 내용은 지난 해 공연을 참관한 이명재 박사의 관람평이다.

받은 감동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크다. 아마튜어와 프로의 장점을 고스란히 뿜어 올리고 있었다. 아마튜어의 청초함과 프로의 매끄러움, 어떻게 보면 조합이 안 될 것 같은 두 지점을 잘 연결하고 있었다.

이 연극은 사회의 부조리극 내지 상황극이라고 할 수 있다. 그뿐 아니라 쇼펜하우어와 헤겔 그리고 니체를 등장시켜 플롯을 구성하고 있으니 철학극이라고도 할 수 있는 작품이다.

이런 다양함 속에 드러나는 주제는 의외로 단순하다. 사람의 겉과 속은 다를 수 있다는 것! 아니, 대부분 다르다는 것. 이 다름의 총합이 '별사람' 없다로의 귀결이다.

서울에서도 강남은 부(富)의 상징으로 통하는 동네다. 거기에다 고학력의 사람들이 '뻐기면서' 살아가고 있다. 이런 조건이 의식을 규정해 부자 대변의 국회의원들이 예외 없이 배출된다.

하지만 이것은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일 뿐이다. 이면의 스토리는 더 큰 우환을 안고 산다. 극 중에 나오는 세 강남 여인은 암, 알콜 중독, 우울증으로 대표되는 현대 병에 포박되어 있다.

독일의 대조적인 세 철학자의 등장도 이채롭다. 내 기억으로 철학자를 다루는 연극이 성공한 예가 없다. 철학은 픽션이 아니라 사실을 고구(考究)하는 관념의 영역이라는 인식 때문일 것이다.

극본을 쓰고 연출까지 맡은 김태흥 대표는 철학 강의로 그 나름의 지평을 넓혀 온 사람이다. 그의 철학 강의는 쉬우면서도 우리의 생활과 밀착해 있는 쪽을 천착한다. 이번 연극도 그것의 결과물이다.

쇼펜하우어의 관념주의와 헤겔의 유물주의는 물과 기름의 관계에 있다고 하겠다. 양자를 교묘하게 관계 지으면서 관객에게 다가가는 모습이 신선하다. 사실 여부를 떠나 관심과 재미를 선사한 것은 일단 성공한 설정이라고 할 수 있다.

영화도 그렇지만 연극은 더 하다. 관객 수가 곧 흥행과 직결되기 때문에 관계자들이 여기에 혼신의 힘을 투여한다. 연극 '사는 게 억울하니?'가 매회 만선(滿船)을 기록한 것은 현대인의 갈증 해소에 성공했다는 얘기가 된다.

현대인의 공통점 하나, 겉과 속이 다르다는 것. 겉으로 호화롭고 행복해 보이는 사람도 한꺼풀 벗겨보면 빈한(貧寒)과 불행이 도사리고 있다. 여기서의 빈한은 경제에 국한되지 않는다. 학력, 건강, 사고(思考), 지역 등 다양한 요소들이 결부되어 있다.

이때 필요한 것이 따뜻한 사랑이다. 사회적 약자에 대한 관심이다. 행복은 나눌 때 싹트는 것임을 이 연극은 말없이 강조하고 있다. 그러니까 연극이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더불어 살아가는 정신이다. 우리는 이를 전통적으로 대동정신이라고 했다.

정신병원에 입원한 니체가 극중에서 '아모르 파티(amor fati)'를 외치고 있다. 운명을 사랑하라는 의미다. 니체 사상의 한 축이기도 한데, 내 운명을 사랑하고 존중할 때 다른 사람도 사랑하게 된다. 나아가 건강한 공동체의 초석이 된다. 대동사회이 근간이다. '아모르 파티'란 노래로 극의 대미를 장식한 것도 이런 점에서 의미롭다.

1시간 40분 분량의 연극이면 많게는 3막, 적어도 2막 정도로 소화해내야 제격이다. 하지만 이 연극은 막의 구분이 없다. 그래도 전혀 지루함이 느껴지지 않는 것은 주제의 현실성과 진행의 신선함에 있다 할 것이다.

영화와 연극이 동일한데, 주연이 있고 거기에 조연과 단역이 따라 붙는다. 이것은 제작과 연출에서 기본 틀이다. 하지만 연극 '사는 게 억울하니?'는 이 틀을 보기 좋게 깨고 있다.

이 연극에 출연하는 배우는 모두 주연이라 해도 될 만큼 두드러진다. 모두 주연이면 다 조연으로 떨어질 위험성을 동시에 갖고 있다. 연극 영화에서는 피하는 배역 분배다. 그런데 이 연극은 '모두 주연'이라는 모험을 성공으로 연결켜 통쾌함을 안겨 준다.

시간 분배의 균형을 말하는 게 아니다. 배역의 적절한 컨택과 알찬 소화를 두고 하는 말이다. "애야, 나 '사는 게 억울하니?'에서 주연 맡았다. 구경 와" 강남의 세 여인, 두 철학자, 마부와 정신과 의사도 누구나 자신있게 할 수 있는 말이고 또한 전혀 틀린 말이 아니다.

기발한 극본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연극은 널리 알려져야 한다. 국민 정서 함양을 위해서도 그렇다. 몇 가지 보완해야 할 점이 없지 않다. 이 연극은 소극장이 아니라 중대형 극장에 올려져야 효과의 극대화를 기대할 수 있다.

따라서 육성으로는 전달에 한계가 따른다. 재공연 때부터 페이스 마이크를 착용하는 것을 주문하고 싶다. 쇼펜하우어의 헤겔에 대한 열패의식은 대단하다. 시골로 낙향, 개에게 헤겔이라는 이름을 붙여 욕설 등으로 감정을 분출한다. 욕설에 그칠 게 아니라 한 번쯤은 개(헤겔)를 발로 내 지르면서 관객들에게 카타르시스를 맛보게 하는 게 어떨까 생각해 보았다.

허무주의자 니체, 말년에 치매에 식분증까지 찾아와 고생을 하는 안타까움이 있다. 이 연극이 철학의 대중화를 목적으로 상정한 것은 옳다. 니체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도 그가 했다는 '신은 죽었다(Gott ist tot)'는 말은 알고 있다. 대중화된 이 말을 넣어 전후 맥락을 자연스럽게 잇는다면 좋지 않을까 싶다,

무엇보다도 배우들의 열연이 돋보인다. 이 연극의 성공은 적재적소에 배치되어 열연을 한 배우들의 공이 컸음은 재언할 필요가 없다. 한 편의 연극을 공든 탑에 비유하기도 한다. 극단 본능이 '사는 게 억울하니?'로 거탑(巨塔)을 쌓았으니 연속 공연 등 보다 발전된 방향으로 이 사회에 기여하기를 바란다. (김천일보 발행인 이명재 철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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