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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가 대왕으로 불리는 이유...오피니언 리더들이 배워야 할 덕목

1.사치를 멀리한 국왕, 정조의 검소한 일상
   - 국왕으로서의 권위를 내세우기보다 절제된 생활을 실천한 정조의 모습과 그의 일상 속 검소함에 대한 사례를 조명한다.  

2. 검소함이 곧 국정 운영의 핵심이 되다
   - 정조는 개인적인 절약을 넘어 국가 재정 운영에서도 검소함을 실천했다. 내시와 궁녀의 감축, 군사 통폐합 등의 정책을 통해 국가 재정을 안정시키려 했던 노력을 분석한다.  

3. 기득권이 본받아야 할 정조의 리더십
  

전태수 기자 | 기사입력 2025/02/18 [10:07]

정조가 대왕으로 불리는 이유...오피니언 리더들이 배워야 할 덕목

1.사치를 멀리한 국왕, 정조의 검소한 일상
   - 국왕으로서의 권위를 내세우기보다 절제된 생활을 실천한 정조의 모습과 그의 일상 속 검소함에 대한 사례를 조명한다.  

2. 검소함이 곧 국정 운영의 핵심이 되다
   - 정조는 개인적인 절약을 넘어 국가 재정 운영에서도 검소함을 실천했다. 내시와 궁녀의 감축, 군사 통폐합 등의 정책을 통해 국가 재정을 안정시키려 했던 노력을 분석한다.  

3. 기득권이 본받아야 할 정조의 리더십
  

전태수 기자 | 입력 : 2025/02/18 [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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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제22대 왕인 정조대왕(1752-1800)의 공식 초상화는 여러 차례 제작되었으나, 현재 원본은 모두 소실된 상태입니다. 현존하는 정조대왕의 초상화로는 1989년에 이길범 화백이 제작한 표준영정이 있으며, 이는 경기도 수원시의 화성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현대 사회는 시간이 흐를수록 심화되는 양극화로 몸살을 앓고 있다. 부유층은 점점 더 사치스러운 생활을 영위하는 반면, 빈곤층은 끝없는 가난의 늪으로 내몰리고 있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노동 없이 얻는 부와 그로 인한 불평등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특히, 몇 억 원에 달하는 최고급 차량을 운전하는 젊은이들의 모습을 보면, 이러한 부의 편중이 과연 공정한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깊어진다.

 

양극화의 심화는 사회 전반에 걸쳐 다양한 문제를 야기한다. 그중 하나는 부유층이나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에 대한 불신이다.

 

물론 모든 부유층이 그런 것은 아니지만, 그들의 과도한 물질적 풍요가 노골적으로 드러나거나, 부를 과시하는 태도를 보일 때, 이는 대중의 비난을 받을 수 있다. 반면, 가진 자가 몸가짐을 조심하고 겸손하게 처신한다면, 그는 오히려 존경받는 지도자가 될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우리는 조선의 22대 왕인 정조의 삶에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 그는 국왕이라는 최고의 지위에 있으면서도 일반 사대부보다 더 검소한 생활을 실천했다. 그의 이러한 태도는 조정의 관료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쳤으며, 나아가 조선 전반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한 사람의 선한 영향력이 널리 퍼진다는 '홍제(弘濟)'의 의미를 몸소 실천한 것이다.

 

정조는 "부지런히 일하고 검소함을 밝히는 것은 우리 왕가의 번영이다."라고 자주 말하곤 했다. 그의 문집인 <일득록(日得錄)>에는 검소함에 대한 이야기가 상당히 많이 등장한다.

 

식사, 의복, 침소 등 일상생활의 다양한 측면에서 그는 검소함을 추구했다. 그러나 그의 검소함은 개인적인 차원을 넘어 국가 예산의 절감으로까지 확대되었으며, 이를 통해 일상에서도 검소함을 유지했다.

 

1776년(정조 즉위년) 3월 16일, 정조는 즉위 직후 궁중에 있던 내시와 액정서 소속 인원 108명, 그리고 궁녀들을 줄이라는 명을 내렸다. 군주가 자신을 보좌하는 내시와 액정서 소속원, 그리고 궁녀의 수를 줄이라는 명령을 내린 것은 조선시대 왕실에서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이는 군주가 자신의 편의를 위해 많은 인원을 둘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재정 절감을 위해 과감한 결단을 내린 것이다. 당시 정조가 내보낸 궁녀의 수는 무려 300여 명으로, 이는 왕실 궁녀의 절반에 가까운 인원이었다.

 

정조가 이처럼 내시와 궁녀들을 대거 내보낸 이유는 국가 재정의 안정을 위해서였다. 숙종 대부터 시작된 기후 이상 현상은 영조 대까지 이어졌고, 이로 인해 농업 생산량이 감소하면서 백성들의 삶은 어려워졌다.

 

영조는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재위 기간 중 40여 년간 금주령을 내렸다. 백성들이 먹을 쌀도 부족한데, 그 귀한 쌀로 술을 빚어 마시는 것을 금지한 것이다. 영조는 조정의 명을 어기고 술을 빚어 마신 이들을 엄격하게 처벌하기도 했다.

 

이러한 상황을 지켜본 정조는 국가 재정의 안정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즉위 후, 그는 국가 재정에 대한 전반적인 보고를 받았는데, 당시 호조 예산의 56%가 국방비로 사용되고 있었다.

 

이는 군대의 장수들 급여로 막대한 비용이 지출되고 있음을 의미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정조는 한양 일대의 군대 통폐합을 단행하는 등 구조조정을 실시했다.

 

그러나 이러한 공적인 조치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한 정조는 군주로서 스스로 모범을 보여 재정 낭비를 막는 것이 중요하다고 여겼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일상생활에서도 검소함을 실천하기로 결심했다. 우선, 그는 하루에 두 끼만 식사하고, 한 끼당 반찬을 다섯 가지로 제한하겠다고 선언했다.

 

당시 국왕의 식사는 아침과 저녁 모두 고기와 11가지 이상의 반찬이 포함된 최고의 음식이었다. 그러나 정조는 이를 거절하고 최소한의 식사만을 하기로 한 것이다. 이러한 원칙은 그가 국왕으로 재위한 24년 동안 변함없이 지켜졌다.

 

또한, 정조는 비단옷을 입지 않기로 했다. 대신 그는 무명옷을 입었다. 정조는 자신이 비단옷을 입지 않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명주옷이 편리한 무명옷보다 못하다. 대체로 사람은 일용하는 의복이 한번 화려하게 되면 사치하고 싶은 마음이 쉽게 생기므로 사치하는 풍습이 점점 성하게 된다.

 

이는 재물을 축내는 것이니 실로 끝없는 피해와 연관된다." 그는 무명옷을 입음으로써 사치로 흐르는 것을 경계하고, 검소함을 몸소 실천했다.

 

정조는 옷이 해지거나 버선에 구멍이 나면 이를 버리지 않고 꿰매어 입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늘 바닥에 앉아 책을 읽었는데, 이로 인해 바지 무릎 부분이 먼저 닳았다.

 

나이가 들어서도 이러한 습관은 변하지 않았고, 계속해서 바지의 무릎과 버선 끝이 해어지면 직접 꿰매어 사용했다. 한 나라의 군주가 옷과 버선이 해어지면 꿰매어 입었다니, 이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정조가 병에 걸렸을 때, 약원의 도제조인 채제공은 정조의 이불을 보고 너무도 놀라 입이 떡 벌어졌다. 국왕의 이불이 너무도 소박했기 때문이다.

 

그는 "삼가 우리 전하께서 쓰시는 이불을 보고 우러러 존경하다 못해 황송하고 부끄러운 생각까지 듭니다. 우리 성상의 검박한 덕은 본디 널리 알려져 있으나, 이처럼 검박한 줄은 생각지 못했습니다. 이처럼 검소한 삶을 실천하고 계시니, 신하된 자로서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일반 백성들도 대개 명주로 이불을 짜는데, 한 나라의 군주이신 전하께서 이렇게까지 소박한 생활을 하시니 더욱 송구스러운 마음이 듭니다."

 

이에 정조는 채제공의 말을 조용히 듣고 나직이 답했다.

 

"나는 장복(長服, 의례용 예복)에는 정결한 것을 취하지만, 평소에는 좋은 것과 나쁜 것을 가리지 않는다. 이는 검박함을 숭상해서가 아니라, 우리 왕실의 가법(家法)을 따를 뿐이다."

 

정조는 자신의 검소함을 스스로 자랑하거나 미덕으로 내세우지 않았다. 단지, 왕실의 전통과 국왕으로서의 본분을 지키는 것뿐이라며 담담하게 말했다. 그러나 그의 생활은 조선 왕실이 유지해 온 전통적 검소함의 수준을 넘어서, 극단적인 절약과 절제의 경지에 이르렀다.

 

정조의 검소함은 사치와 낭비를 멀리하는 것에서 끝나지 않았다. 그는 이를 통해 절감한 예산을 백성들을 위해 사용했다. 국가 재정이 어렵다는 이유로 국왕이 사치와 낭비를 줄이고, 그로 인해 남은 재정을 백성의 삶을 개선하는 데 투입하는 사례는 조선의 역사에서 보기 드문 일이었다.

 

이러한 정조의 철저한 검소함은 궁궐 내 신하들과 왕실 가족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쳤다. 궁녀들과 내시들에게도 과도한 치장을 하지 못하게 하였고, 신하들에게도 지나친 사치를 피하도록 권장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왕실뿐만 아니라 조정에서도 검소함이 하나의 미덕이 되었고, 자연스럽게 조선 사회 전반에 확산되었다.

 

정조는 검소한 생활을 통해 재정을 절감하는 것뿐만 아니라, 지도층이 백성을 위해 앞장서야 한다는 강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검소함에서 사치로 가기는 쉬우나, 사치에서 검소함으로 돌아가기는 어렵다"라는 고사를 자주 인용하며, 지도자가 먼저 절제된 삶을 실천해야 백성들도 그에 따를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러한 정조의 태도는 오늘날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현대 사회에서 많은 지도층 인사들이 과도한 특권을 누리고, 사회적 불평등이 심화되는 가운데, 정조의 검소한 리더십은 기득권층이 본받아야 할 중요한 가치로 재조명될 필요가 있다.

 

정조는 국왕으로서 자신의 편안함이나 안락함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의 미래와 백성들의 삶을 위해 스스로 불편함을 감수했다. 이는 단순한 미덕이 아니라, 진정한 지도자가 갖추어야 할 덕목이었으며, 이러한 실천이 있었기에 그는 역사 속에서 가장 존경받는 군주 중 한 명으로 남을 수 있었다.

 

오늘날 사회 지도층이 정조의 검소한 태도를 본받는다면, 양극화와 불평등이 심화된 현대 사회에서도 희망의 불씨를 되살릴 수 있을 것이다. 검소함과 절제는 단순한 미덕이 아니라, 사회적 신뢰를 높이고 공정한 공동체를 형성하는 데 필수적인 요소다. 정조의 검소한 리더십이야말로 오늘날 지도자들이 새겨야 할 중요한 교훈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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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기후변화 발행인
내외신문 대표 기자
금융감독원, 공수처 출입기자
사단법인 환경과미래연구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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